HEILL · 해일

디자이너의 길

패션디자이너 양해일 자서전
HEILL 컬렉션 — 책가도(冊架圖)를 모티브로 한 드레스
HEILL 컬렉션 — 책가도(冊架圖)를 모티브로 한 드레스 · 사진 출처: modemonline.com
초안 · 일부 사실 확인 중
제 1 장

뿌리와 성장

강(江)에서 시작된 사람

나는 임진강 옆에서 태어났다. 파주, 강가의 작은 마을이었다. 6·25가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 식구가 흘러 흘러 닿은 곳이 거기였다. 그 강에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자랐으니, 내 어린 날의 풍경은 늘 물소리와 함께 떠오른다.

집안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어머니부터 꺼내야 한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그 시절에 글을 알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무엇보다 돈을 벌 줄 아는 분이었다. 충청도 대천에서 나신 어머니는 젊어서 청진의 일본인 방직공장에 들어가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같은 공장의 공장장이었다. 전라북도 군산 사람이었다.

두 분은 거기서 만났다. 그런데 그 공장에는 묘한 규칙이 있었다고 한다. 직원끼리 연애를 하면 무조건 추방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두 분의 사이가 그만 드러나고 말았다. 임신한 몸으로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만주까지 가서 큰아들을, 그러니까 나의 맏형을 낳으셨다. 만주에서 시작된 우리 집안의 이야기는, 그렇게 한 번 국경을 넘고서야 비로소 한 가족이 되었다.

어머니라는 사람

우리 형제는 여덟이다. 나는 그중 막내다. 위로 형과 누나들이 줄줄이 있었고, 터울도 제법 컸다. 막내라는 자리는 사랑을 많이 받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늘 어머니 곁에 붙어 다니는 자리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파주 임진강가에 자리를 잡았을 때, 어머니는 가만히 계시지 않았다. 강 주변은 온통 미군 부대였다. 어머니는 거기서 돈을 만지는 일을 하셨다. 막내인 나는 늘 어머니를 따라다녔는데, 어머니는 어린 나를 방패 삼아 일을 보곤 하셨다. 검문이 있어도 아이를 안고 있으면 그냥 지나가던 시절이었다. 이 대목은 어머니가 내게 "이런 건 비하인드 스토리니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하셨던 이야기라, 더 자세히는 적지 않겠다. 다만 어머니가 얼마나 억척스럽게 식구를 먹여 살렸는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으로만 남겨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많지 않다. 어머니가 워낙 강한 분이라, 경제도 살림도 다 어머니 손에 있었다. 청진 방직공장 공장장까지 지낸 분이었으니 능력이 없는 분은 아니었을 텐데,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 앞에서 꼼짝을 못 하셨다. 집안의 중심은 늘 어머니였다.

안양, 그리고 절

임진강을 떠나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안양이었다. 어머니는 거기서 또 한 번 사업 수완을 발휘하셨다. 유리병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 시절 농약병은 전국에서 회수해다가 깨끗이 닦고 다시 만들어 쓰곤 했는데, 어머니가 그 일로 큰돈을 버셨다. 안양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갖고 있었으니, 그때 형편으로는 대단한 것이었다. 안양경찰서장이 우리 집에 인사를 다닐 정도였다.

그렇게 돈을 모은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절을 사셨다. 수리산 자락의 절이었다. 사서 직접 운영까지 하셨다. 어머니는 신앙이 깊은 분이었고, 그 신앙은 훗날 내게도 흘러들어 왔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원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정작 크게 성공한 자식은 하나도 없었다며 늘 안타까워하셨다. 내게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너는 양씨 집안을 세상에 알려라." 그 한마디가 내 평생을 끌고 왔다. 나는 지금도 돈 버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직 명예를 좇아 여기까지 왔다. 그건 어머니가 내게 새겨준 말이다.

홍은동, 골프장, 그리고 멋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서울 홍은동으로 이사했다. 어머니의 학구열 때문이었다. 좋은 환경에서 아들을 공부시키겠다,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서울 학교로 옮기기가 싫었다. 안양에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집은 홍은동에 두고도 학교는 계속 안양으로 다녔다.

그 무렵 내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 큰누나였다. 누나는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캐디 마스터로 일했다. 덕분에 나는 주말이면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토요일 하루 캐디 일을 하면 받는 돈이 어마어마했다. 지금 돈으로 치면 30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고등학생이 하루 일해서 그만한 돈을 손에 쥐었으니, 그 시절 내게는 작은 세상 하나가 열린 셈이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한턱을 내곤 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썼다. 어려서부터 나는 옷을 좋아했다. 교복 안에 늘 멋을 부린 옷을 받쳐 입었다. 그림도 좋아해서,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듣고 따로 그림 공부도 했다. 예술고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밖에서 그림을 배웠다.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향한 마음은 그때 이미 내 안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 예술이니 멋이니 하는 것을 입에 올리면 "사내자식이 무슨" 하고 핀잔을 듣기 십상이었는데, 우리 집은 달랐다. 신여성이었던 어머니 덕분에, 나는 내 안의 멋과 그림에 대한 열정을 비교적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강가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색(色)과 형(形)을 향해 천천히 방향을 잡아가고 있었다.

제 2 장

패션의 길, 그리고 일본

모델이 되던 날

옷을 좋아하던 청년이 패션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 첫 계기는 뜻밖에도 모델이었다. 모델라인이라는 곳에서 모델 선발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친구를 따라 별생각 없이 그 자리에 갔다. 그런데 친구도 붙고 나도 붙었다. 그렇게 나는 모델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건 우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옷을 좋아했고, 옷을 잘 입으려 애썼고, 그런 쪽으로만 생활해 온 사람이었다. 멋을 향한 그 오랜 마음이 마침내 무대 위에서 모양을 갖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영어에도 관심이 많았다. 김포로 들어오는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을 우리 집에 재워주곤 했는데, 그렇게 외국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영어를 익혔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나를 그렇게 움직였다.

군대, 그리고 한 미국 친구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라가 어수선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거리마다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래서 군대를 일찍 갔다. 영어를 좀 한다는 이유로 통역병을 맡게 되었다.

동두천 미군 부대에서 통역 일을 하던 중에, 나는 한 미국 친구를 만났다. 톰 러번이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제대 후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더니, 한국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일본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와서 직접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갈림길에 섰다. 미국으로 갈 것인가, 일본으로 갈 것인가. 패션의 꿈을 펼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톰의 편지가 나를 일본으로 이끌었다.

일본에서 알게 된 것

처음 일본에 갔을 때는 곧장 패션 학교로 간 것이 아니었다. 일반 학과에서 일본어부터 공부했다. 본래 목표는 분카복장학원(文化服装学院)이었다.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패션을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명문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에스모드(ESMOD)가 일본에 처음 문을 열었다. 1985년이었다. 프랑스의 그 유명한 학교가 일본에 막 상륙한 첫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진로를 바꿔 에스모드 도쿄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나는 에스모드 도쿄의 1기 입학생이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나는 한 프랑스인 교수를 만났다. 미셸 몽샤라는 교수였다. 그분과 나는 유난히 마음이 잘 맞았다. 옷을 보는 눈, 색을 보는 감각이 통했다. 나는 그 학교에서 2년을 마쳤다. 1985년과 1986년, 꼬박 두 해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보낸 그 시간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작 일본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일본에 가기 전까지 나는 패션의 메카가 어디인지조차 몰랐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그랬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보니, 일본 학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프랑스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길을 잘못 잡았구나. 패션의 진짜 메카는 파리구나.

파리로 부르는 목소리

나와 마음이 맞았던 그 교수도 2년이 지나자 파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분은 떠난 뒤에도 계속 내게 연락을 해왔다. 파리로 들어오라고, 어서 오라고. 그 부름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그 교수는 나라는 사람을, 그리고 내 가능성을 눈여겨봐 두었던 모양이다. 결국 나는 그분의 부름을 따라 1987년, 파리로 가는 길에 올랐다. 한 사람의 인연이 내 인생의 방향을 또 한 번 크게 틀어놓은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파리에서의 시간은, 머지않아 내 평생의 모티브가 될 무언가와 나를 만나게 한다. 한국에서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우리의 색, 우리의 그림 — 민화(民畵)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풀어야 할 또 하나의 큰 이야기다.

제 3 장

파리, 운명의 도시

일본에서 패션을 배우는 동안,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패션의 메카는 결국 파리라는 것이다. 그 길을 열어 준 사람은 도쿄에서 나를 가르친 미셸 몽사르 교수였다. 교수는 일본을 떠나며 나에게 말했다. "파리로 와라."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꿨다. 나는 그 권유를 따라 1987년, 짐을 꾸려 파리로 향했다.

그 비행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가장 싼 비행기를 찾다가 고른 것이 에어 랑카, 스리랑카 항공이었다. 도쿄에서 출발해 홍콩, 태국, 스리랑카, 지중해의 어느 섬, 암스테르담을 거쳐서야 파리에 닿았다. 완행이었다. 내 자리는 그대로인데 옆자리 사람만 계속 바뀌었다. 그렇게 나흘이 갔다. 가족에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걸었더니, 떠난 지 나흘이나 됐다고 했다. 지금도 그 여정을 떠올리면 4박 5일을 비행기 안에서 잠들고 깨던 그 감각이 생생하다.

파리에서 나를 가장 먼저 흔든 건 한 박물관이었다. 기메 박물관. 미셸 몽사르 교수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그때까지 민화라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무당 그림이나 창호에 그려진 그림 정도로만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곳에 두루마리로 된 우리 그림들이, 책가도가, 직지가 걸려 있었다. 한국에서 건너간 것들이라고 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 이런 작품들이 있었구나. 민화를 처음 제대로 본 것이 한국이 아니라 파리였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도 묘하다.

교수는 책가도 앞에서 그 진한 파란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색은 중동에서 들여온 굉장히 비싼 물감인데, 일본에도 중국에도 없는 색을 조선이 썼다고. 한국의 회화가 일본이나 중국보다 뛰어난 이유가 바로 그 오방색에 있다고 했다. 외국인의 눈으로, 역사와 함께 한국을 보니 내 안에서 무언가 탁 트였다. 교수는 또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디자이너로 인정받으려면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샤넬에 샤넬의 역사가 있듯, 한국의 브랜드가 세계에 서려면 한국의 디자인으로 그 나라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고. 그 말은 평생 내 안에 남았다.

파리에 도착해 가장 그리웠던 건 한국 음식이었다. 매일 빵과 프랑스 음식만 먹다 보니 한식이 사무치게 당겼다. 한국 사람을 만나려면 교회를 가 보라는 말을 듣고, 한인교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한국 음식을 나눠 주었다. 그때 같이 교회를 다니던 유학생들은 지금 한국에서 다들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어 있다. 그 시절엔 유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 교회는 결혼식도, 아이들의 성장도 함께한, 40년이 된 우리 가족의 교회가 되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교회는 아내가 다니던 교회이기도 했다.

교회에서 사귄 친구가 한식당을 하나 알려 주었다. 매일 밥을 먹을 수 있다기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일본어는 잘했지만 불어는 서툴던 때였다. 그 식당의 면접을 본 사람이, 훗날 내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웨이터 다섯 중 막내로 일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 본 터라 손님 옆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주문을 받았더니, 프랑스 손님들이 놀라며 팁을 후하게 주었다. 그 모습을 카운터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아내였다.

결혼까지의 길은 짧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처음에 반대했다. 공부하러 보냈더니 식당 일을 한다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아내 쪽에서 조건을 걸었다. 양복은 크리스찬 디올, 시계는 까르띠에, 팔찌는 까르띠에 러브 브레이슬릿. 그때 한국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던 것들이었다. 결국 그 조건을 갖춰 결혼했다. 결혼하자 영주권이 나오는 길이 열렸고, 비로소 나는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취업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처음 정식으로 일하게 된 곳이 또랑뜨(TORRENTE) 오트쿠튀르였다. 여러 회사에 면접을 봤지만 불어가 서툴러 번번이 떨어졌다. 그런데 또랑뜨에는 한국인이 한 분 계셨다. 신혜정 선생님. 그분이 나를 채용했다. 한국에서 패턴을 하다 파리로 건너와 또랑뜨에 자리를 잡은 분이었는데, 그분이 바로 프랑스 영부인의 옷을 전담하는 사람이었다. 또랑뜨의 마담이 영부인과 가까운 친구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국인 선배의 손에 이끌려 오트쿠튀르의 세계로 들어섰다.

제 4 장

영부인의 디자이너

또랑뜨에서 나는 신혜정 선생님 곁에서 일했다. 그분이 프랑스 영부인, 마담 미테랑의 옷을 전담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나도 그 작업에 함께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어떻게 프랑스 영부인의 옷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답은 단순하다. 또랑뜨의 마담이 영부인과 가까운 친구였고, 그 또랑뜨 안에 한국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기회가 이어진 것이다. 실력 이전에, 먼저 그 자리에 가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오트쿠튀르의 작업은 상상 이상으로 느렸다. 재킷 하나를 만드는 데 석 달, 드레스 하나에 여섯 달이 걸렸다. 디자인은 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었다. 디자인을 하는 스타일리스트가 있고, 패턴을 뜨는 모델리스트가 있고, 재단과 봉제를 맡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아틀리에가 여럿이라 한 팀은 다른 팀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렇게 각자 만든 것을 마지막에 한자리에 모아 모델에게 다 입혀 본 뒤, 무대에 올릴 것과 내릴 것을 결정했다. 그 방식을 그곳에서 배웠기에, 지금 내 쇼를 준비할 때도 나는 늘 그렇게 한다.

그 시절 가장 또렷이 떠오르는 건 황금색 드레스다. 컬렉션을 위해 황금색 실로 한 땀 한 땀 짜 올린 드레스였다. 6개월을 꼬박 들였다. 무대에 올린 그 옷을, 사우디 공주가 그 자리에서 사 갔다. 1990년대 기준으로 150만 프랑이었다. 우리가 옷을 만들 때는 늘 품을 넉넉히 두는데, 그 여유분 덕에 공주의 몸에 맞춰 다시 손볼 수 있었다. 회사에 속한 디자이너였으니 그 값이 내게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드레스의 결만큼은 지금도 머릿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파리의 또랑뜨에서 한국인이 프랑스 영부인의 옷을 만든다는 사실은,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롯데그룹에서 나를 찾아왔다. 파리까지 직접. 마침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곧 청와대로 들어갈 영부인의 옷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좋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연봉부터, 아파트와 차까지 함께 따라왔다. 1993년 무렵의 일이다.

한국에서 나는 영부인 손명순 여사의 의상을 맡았다. 청와대에 옷을 만들어 들이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30대였다. 회계사로 치면 30대에 큰일을 맡는 셈이라 부담스럽지 않았느냐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최고 수준의 작업을 보고 온 눈에는, 그 무렵 한국 영부인 의상의 수준이 오히려 낮아 보였다. 이 정도는 충분히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젊고 거침없던 시절이었다.

청와대 작업은 2년 만에 끝났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청와대에 연결해 준 사람이 영부인과 가까운 친인척 관계였는데, 권력 주변에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이 한꺼번에 정리되던 흐름에 나도 함께 휩쓸렸다. 나는 롯데와 그보다 긴 계약이 남아 있었다. 청와대 일이 끝나도, 계약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남은 기간을 어떻게 채웠는가. 마침 롯데가 파코라반(Paco Rabanne)이라는 프랑스 브랜드를 한국에 들여오고 싶어 했고, 내가 그 가교 역할을 했다. 롯데가 파코라반을 들여오면서, 나는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그 일을 맡아 나머지 기간을 채웠다. 청와대 의상 디자이너에서 한 브랜드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자리는 바뀌었지만 일은 끊기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신기한 일이다. 파리에서 영주권을 얻어 취업하자마자 프랑스 영부인의 옷을 만들었고, 그것이 롯데의 눈에 띄어 한국에 와서는 우리 영부인의 옷을 만들었다. 영부인의 옷만 만든 셈이다. 물론 영부인의 옷만 1년 내내 붙들고 있었던 건 아니다. 또랑뜨에 있을 때나 한국에서나, 시즌에 맞춘 일반 컬렉션을 함께 하면서 그 사이사이 영부인의 옷을 했다.

파코라반 계약을 채우고 나는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여러 회사의 일을 하던 시절, 또 한 번의 인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한 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분의 동생 부부가 파리에 왔는데, 우리 집에서 재워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변호사인데 돈도 없느냐고 농담처럼 되물었더니, 인권 변호사라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아이가 두세 살 무렵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스무 해도 더 전의 일이다.

그 부부가 바로 훗날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때 파리 우리 집에 머문 분들과 맺은 인연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영부인에서 손명순 여사로, 다시 김정숙 여사로. 나는 그렇게 세 번, 영부인의 옷을 짓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제 5 장

HEILL, 민화를 입다

파리에서 보낸 시간은 길었다. 또랑뜨에서 시작해 테드 라피두스와 파코 라반의 아틀리에를 거치며 20년 가까이 그 도시의 공기를 마셨다. 서양의 옷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마름질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나는 도리어 한 가지 질문 앞에 자주 멈춰 서곤 했다. 나는 무엇을 입히고 있는가.

대답은 의외로 먼 곳에 있지 않았다. 1987년 파리의 기메 박물관에서 처음 마주한 우리 민화. 한국에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림들이, 파리의 유리장 안에서 나를 붙들었다. 그 강렬한 원색과 천연덕스러운 해학, 민중의 소망이 그대로 박힌 호랑이와 책가도. 패션은 결국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를 입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 앞에서 비로소 알았다. 남의 문화를 잘 짓는 장인으로 늙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대를 한국으로 옮겼다. 브랜드 이름은 '해일(HEILL)'로 정했다. 내 이름에서 따왔지만, 한국 패션이 일으킬 거대한 물결을 담고 싶다는 욕심도 함께 넣었다. 2013년 수원 화성 행궁광장에서 쇼를 올리고, 그해 '올해의 디자이너'로 불리면서 나는 비로소 내 이름으로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부터는 매 시즌 파리패션위크 오트쿠튀르 무대로 돌아갔다. 떠나온 도시로, 이번에는 우리 그림을 안고서.

내가 민화를 다루는 방식은 한 가지 원칙 위에 있다. 옛 그림을 옷에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 그건 박제다. 나는 문자도의 효(孝)와 충(忠)을, 책가도의 서가와 문방사우를, 능행도의 행렬을 일단 잘게 해체한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기하학적인 절개선이 되고, 책가도는 재킷 안감 속 추상화가 된다. 그렇게 현대의 실루엣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2018년 르 브리스톨 호텔에서 선보인 백호랑이, 2019년 리츠 파리에서 태극기와 책가도로 채운 3·1운동 100주년 무대가 모두 그 결과였다. 한국인이 그 호텔에서 단독으로 쇼를 연 것은 처음이라고들 했지만, 내게 더 중요한 건 우리 그림이 그 샹들리에 아래에서 촌스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옷을 짓는 방식도 결국 같은 이치다. 누군가 출장을 떠난다고 하면 나는 거창한 주문을 받지 않는다. 미국을 간다, 중국을 간다 — 그 간단한 장소 하나면 충분하다. 그곳의 공기와 격식에 맞게 디자인을 해서 시안을 먼저 보여주고, 거기서 고른 것을 비로소 옷으로 짓는다. 입을 사람의 자리를 먼저 헤아리는 일, 그게 내 작업의 출발점이다.

이 모든 길을 나는 혼자 걷지 않았다. 파리 시절부터 동행해 준 아내와, 그곳에서 자라 3개국어를 하는 딸 양이네스가 곁에 있다. 딸은 디자인과 해외 비즈니스를 함께 맡아, 파리에 거점을 두고 나와 부녀의 호흡으로 브랜드를 끌고 간다. 'Art meets Fashion' — 우리가 내건 이 한 줄은 가족의 작업 방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더러 나를 타고난 감각의 디자이너로 보지만, 나는 천재형이 아니다. 내 안목은 전부 발품에서 나왔다. 낯선 도시를 걷고, 오페라 극장에 앉고, 박물관 유리장 앞에 오래 머문 시간들. 그 모든 경험이 쌓여 어느 날 가위 끝으로 나온다. 기메 박물관에서 민화를 본 그 하루처럼. 나는 노력하고 집념으로 버틴 사람이고, 그래서 다음 그림 앞에서도 또 오래 서 있을 것이다.

민화를 입은 컬렉션 — 영사재(永思齋) 한옥을 배경으로
민화를 입은 컬렉션 — 영사재(永思齋) 한옥을 배경으로 · 사진 출처: modemonline.com
민화 드레스 — 한국 전통 회화의 현대적 재해석
민화 드레스 — 한국 전통 회화의 현대적 재해석 · 사진 출처: modemonline.com
한복의 선을 살린 드레스
한복의 선을 살린 드레스 · 사진 출처: modemonline.com
블루 테일러드 룩
블루 테일러드 룩 · 사진 출처: modemonline.com
제 6 장

고난, 그리고 다시 파리로

옷을 지었을 뿐이다.

손명순 여사의 의상을 지었고,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영부인을 위한 옷도 만졌다. 그리고 김정숙 여사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같은 일이었다. 한국적인 미감을 격식 있는 자리에 올려놓는 일, 옷 한 벌로 그 나라의 문화를 입혀 보내는 일. 디자이너로 사는 동안 나는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지 죄로 여긴 적이 없었다.

2022년, 정권이 바뀌고 그 옷이 문제가 되었다. 이른바 '옷값 파문'이었다. 나는 디자인을 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모든 문이 닫혔다. 출국금지가 내려졌고, 매 시즌 서던 파리의 런웨이가 한순간에 막혔다. 디자이너에게 무대를 잃는다는 것은 손발이 묶이는 일이다. 나는 파리에 팀을 두고 원격으로 컬렉션을 지휘하며 브랜드의 명맥만 겨우 이어갔다.

그 시절을 길게 적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장면만 남겨둔다. 우리 가게는 2층이었고, 그 위가 우리 집이었다. 어느 날부터 가게 앞에 기자들이 상주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옷을 사 입고 싶어 하던 손님들조차 눈치를 보느라 발길을 끊었다. 결국 우리는 집을 비웠다. 차트도, 그동안 쌓아온 것들도 다 정리하고 떠났다. 경제적으로도 바닥이었다. 사십 년 패션만 하고 산 사람이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가난이 아니라, 옳다고 믿어온 일이 의심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나는 가위를 놓지 않았다. 무대가 없으면 책상 위에서라도 다음 시즌을 그렸다. 멈추면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긴 터널에도 끝은 있었다. 수사 끝에 자금 출처에 대한 혐의는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출국금지가 풀렸다. 나는 다시 파리로 향했다. 2025년 10월 6일, 파리 샹그릴라 호텔에서 '호랑이와 민화'를 주제로 한 26 S/S 컬렉션을 올렸다. 호랑이는 민화 속에서 사납기보다 익살스럽다. 나는 그 표정에 내 마음을 실었던 것 같다. 무너지지 않았다고, 다시 여기 섰다고.

명예가 회복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회복이라는 말은 어쩐지 과거를 향해 있다. 나는 앞을 보려 한다.

내년에도 파리에 선다. 트렌드를 분석하는 회사들이 다음 시즌의 색과 흐름을 미리 보내오면,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다시 나의 언어로 바꾼다. 87년 파리의 한 동양 박물관에서 처음 민화를 마주쳤던 그 충격이, 지금도 매 컬렉션의 출발점이다. 한국의 미감을 베이스에 깔고 있기에, 세계가 나를 부른다고 나는 믿는다.

요즘은 공방을 다시 세우는 일을 구상하고 있다. 한국에는 K-팝이 있고 K-뷰티가 있는데, 정작 세계가 알아주는 패션 브랜드는 아직 없다. 그 빈자리를 메우는 일에 남은 시간을 쓰고 싶다. 브랜드는 저절로 크지 않는다. 누군가 믿고 투자하고 키워줘야 산다. 나는 좋은 사람, 길게 함께 갈 사람을 찾고 있다.

이 책을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화려한 파리의 런웨이만 기록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다. 막힌 문 앞에서 가위를 쥐고 버틴 시간까지 적어야 한 사람의 진짜 궤적이 된다. 나처럼 자기만의 색깔을 지키려다 흔들리는 후배들에게,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멈추지만 않으면 문은 다시 열린다.

나는 다시 파리로 간다.

2019 F/W 파리 리츠 —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책가도·태극 모티브
2019 F/W 파리 리츠 —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책가도·태극 모티브 · 사진 출처: fashionseoul.com
2025 파리패션위크 컬렉션 (Gallery Chaman)
2025 파리패션위크 컬렉션 (Gallery Chaman) · 사진 출처: gallerychaman.com
2026 S/S HEILL X WINNE — '호랑이와 민화' (2025.10 파리 샹그릴라 호텔)
2026 S/S HEILL X WINNE — '호랑이와 민화' (2025.10 파리 샹그릴라 호텔) · 사진 출처: biz.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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